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22세 (문단 편집) === 프란치스코회 '청빈'[* 청빈, 정결, 순명의 3가지 덕목을 복음삼덕(福音三德)이라 하며, [[가톨릭]]의 [[성직자]]와 [[수도자]]는 [[성품성사]]/수도서원 때 복음삼덕을 일생토록 지키겠다고 서약한다. 다만 청빈 외에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ㆍ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지 교리나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믿으면 안 된다.] 논쟁 === 교황 요한 22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영성파가 [[예수]]와 사도들이 무일푼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칙서 《씨 뿌리는 자가 나갔다》(Exiit qui seminat)를 인용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자 이를 지나치다고 보았다. 1317년 요한 22세는 공식적으로 ‘프라티첼리’(Fraticelli)라고 알려진 그들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1322년 3월 26일 그는 칙서 《Quia nonnunquam》을 발표해 전임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칙서에 담긴 내용이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한 청빈 사상을 조사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위촉했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다수는 교회의 재산 소유권 자체를 부정한다면서 "그들의 청빈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판했다. 1322년 5월 페루자에서 열린 [[프란치스코회]] 총회는 이에 반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길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에게 그 길을 따르도록 모범을 보여주심으로써 사도들도 그 길을 따르셨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물건을 단지 사용만 하셨을 뿐,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으셨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이며, 이는 이교적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가톨릭]]적이다.”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요한 22세는 1322년 12월 8일 칙서 《교회법의 창시자》(Ad conditorem canonum)를 반포하여 "절대적인 재산 포기가 반드시 완덕의 생활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더는 프란치스코회의 부동산과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프란치스코회원들이 재산과 부동산을 스스로 소유하며 살아가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1323년 11월 12일에는 칙서 《몇몇 사람들 중에는》(Quum inter nonnullos)을 반포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며 [[이단]]적"이라고 선언했다. 수도회 총장 체세나의 미켈레와 잉글랜드 관구장 [[오컴의 윌리엄]], 베르가모의 보나그라지아 등 프란치스코회의 유력 인사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1324년 루트비히 4세가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의 편에 서서 교황을 이단자라고 비난하였다. 니콜라오 3세의 칙서 《씨 뿌리는 자가 나갔다》(Exiit qui seminat)가 고정불변이라는 반대자들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요한 22세는 1324년 11월 10일 칙서 《그들의 마음이 이러한 고로》(Quia quorundam)를 반포하여, 전임 교황의 칙서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실제로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적 생활은 어떠한 소유물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추론된다. 왜냐하면 청빈한 삶을 살라고 해서 그것이 아예 아무 것도 소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1328년 체세나의 미켈레는 교황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와 결탁한 죄를 추궁받기 위해 아비뇽으로 호출되었다. 미켈레는 프란체스코 다스콜리와 보나그라지아, 오컴의 윌리엄과 함께 아비뇽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해 1월 루트비히는 로마에 입성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4세로 등극하였다. 3개월 후, 루트비히 4세는 요한 2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는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인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로 내세웠다. 그러나 대립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은 미미하였다. 그 해 5월 28일 [[볼로냐]]에서 열린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이틀 전 동료들과 함께 아비뇽에서 탈옥한 체세나의 미켈레가 수도회 총장으로 재선임되었다. 그러나 6월 6일, 요한 22세는 미켈레를 프란치스코회 총장직에서 해임 조처하고, 프란치스코회 출신 추기경 투르의 베트랑드를 임시 총장에 임명하였다. 미켈레는 자신의 해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문제를 판단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는 두 개의 항소문을 발표하였다. 그 해 8월, 루트비히 4세와 대립교황은 [[나폴리 왕국]]의 왕 로베르토가 공격하기 전에 로마를 떠났다. 프란치스코회원들 중 소수만이 요한 22세의 반대편에 섰으며, 대다수는 1329년 파리에서 총회를 열어 프랑스 출신 제라드 오도니스를 새 총장으로 선출하고 교황에게 순명한다고 선언하였다. 미켈레는 새 총장에게 비난을 쏟아냈지만 헛된 일이었으며, 오히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실상 열외로 취급받았다. 요한 22세는 체세나의 미켈레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1329년 11월 16일 《Quia vir reprobus》를 반포하였다. 1330년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가 요한 22세에게 항복을 선언했으며, 전 총장 미켈레와 오컴의 윌리엄 등이 연이어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